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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하나

역사│경남의 3·1 만세운동과 의의 ( 밀양, 부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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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의 3·1만세운동

출처 : 뉴스핌

[ 경남 3·1 만세운동의 배경 ]

 경남지역은 3·1 독립운동 기간 중 만세시위가 가장 격렬하게 전개된 곳 중 하나다. 경남은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까워 일찍부터 침략의 거점이 됐다. 그래서 일본인이 많이 거주하였는데, 1910년대 말 경남에는 경기도 다음으로 일본인이 많이 거주해 약 6만여명에 달했다. 일본은 부산과 마산 등 개항장을 중심으로 대거 들어와 토지, 어장, 상업 전반에 걸쳐 경제적 침탈을 했다. 일본은 도청 소재지인 진주에 도청, 군청, 지방법원, 헌병대, 수비대를 뒀다. 부산에는 부청, 지방법원, 헌병분대, 수비대가 있었고, 마산에는 부청과 군청, 지방법원 지청이 있었다. 진해에는 군항을 설치해 일본 해군의 중요항으로 삼았고 육군요새사령부와 진해만 중포병대대를 뒀다. 경남은 이러한 일제의 침탈이 심해 민족적 반감이 높았다.

 

자료원 : 경남신문

[ 경남 3·1만세운동의 현황 ]

 경남 3·1운동은 그 기간만으로도 전국에서 가장 길고 가장 늦게까지 전개됐다. 경남에서는 3월 중순부터 4월 하순까지 총 179회의 시위가 거의 매일 전개됐다. 시위 참가 인원은 연인원 약 10만명에 달했다. 충북 다음으로 전국에서 가장 늦은 시기에 점화됐지만 치열하게 진행됐다. 179회 시위 중 44회는 일제의 발포에 맞섰고, 20회는 관공서와 일본인 집, 일본인 관·공리와 친일파를 공격했다. 이 과정에서 사망자 81명, 부상자 233명이 발생했다. 경남에서 전개된 3·1운동에 대해 일제 관헌기록에 따르면 “3월 11일 발발, 4월 29일에 이른 50일간에 걸쳐 일어났다. 그간 무사 평온한 날은 14일이고, 36일에 걸쳐 소요가 일어났다. 가장 빈발한 날은 4월 3일 16회로 가장 많고, 하루 평균 발생 횟수는 3.6회다. 소요 인원이 가장 많은 곳은 합천군 삼가면 금리의 1만명이다. 다음으로 진주와 하동읍내에서 6000명이 참여했고, 가장 적게는 김해 읍내에서 7명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경남에서는 3월 9일 함안 칠북/ 3월 11일 부산/ 3월 13일 동래, (창녕)영산, 밀양/ 3월 14일 창녕, 통영, 의령/ 17일 함안/ 18일 합천, 진주, 통영, 하동 등으로 시위가 확산되었다. 창원, 양산, 함양, 김해는 3월 하순/ 울산, 남해는 4월 상순에 전개됐다.

이 중 밀양부산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살펴보려 한다.


1. 밀양의 독립만세운동

밀양 3·13 만세운동 재현, 출처 : 뉴시스

[ 밀양 만세운동의 전개 ]

∎ 3월 13일 밀양면 만세운동

 고종의 장례식을 보러 상경했다가 시위를 직접 체험하고 돌아온 윤치형, 윤세주 등이 사립 동화중학교 교장 전홍표에게 이를 보고하고 시위를 준비하였다. 3월 13일 오후 1시 30분경 윤세주의 독립선언서 낭독을 시작으로 독립만세시위를 시작하였고 약 천 여명이 참가하였다. 그러나 부산에서 급파된 일본 헌병과 수비대에 의해 시위 군중은 일단 해산되었다.

∎ 3월 14일 밀양 공립보통학교 학생 만세운동

 밀양공립보통학교 학생만세운동은 13일 만세운동의 한 대열이 태극기 등을 교실에 산포하면서 그것에 고무된 밀양공립보통학교 학생 160여 명이 다음날 3월 14일, 직원들의 제지를 뚫고 거리로 뛰쳐나와 태극기를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행진했고 읍내의 2백 여 명 군중들이 호응하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군중은 해산, 주동 인물들은 구금되었다.

∎ 3월 15일 유림의 만세운동

 밀양의 유생들이 밀양 유림구락부(유림회)에서 비밀리에 긴급모임을 갖고, 3월 15일 밀양강변 솔밭광장에서 시회하기로 정하였다. 수천 명의 유생들이 모여 강시를 하다가 거리로 나가서 ‘독립만세’를 연창하며 행진하였다. 거리 군중들이 시위대열에 합류하면서 만세군중이 5천명으로 늘어났다. 또한, 기독교인 수백 명이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합세하여 갑자기 만세물결로 뒤덮이자 일제 경찰과 헌병은 총검을 휘두르고 펌프로 물을 퍼붓는 등 군중을 해산시키고 주동자들을 체포하였다. 이날 만세운동으로 유생, 기독교인, 일반주민이 많이 검거되어 투옥되었다고 하나 자료가 없어 구체적 실상은 알 수 없다고 한다.

∎ 3월 20일 밀양면 만세운동

 3월 20일, 밀양의 덕망인사 안희원의 장례일로, 오후 2시쯤 장례행렬이 시장 중심을 지날 무렵 상여소리가 갑자기 만세소리로 바뀌어 시위행렬로 변하였다. 일제 경찰과 헌병이 총출동하여 군중을 해산시키고 유림 수십 인과 기독교인 5명을 검거하였다.

∎ 4월 2일 밀양소년단 만세운동

 밀양소년단은 밀양공립보통학교 졸업생, 재학생 등으로 조직된 비밀학생단체로 파악된다. 밀양공립보통학교 졸업생인 윤차암, 윤수선 등을 중심으로 4월 2일 저녁, 학생들 50여명이 의거하였고 14명이 체포되었다.

∎ 4월 4일 단장 장날 만세운동

 3월 20일, 양산 통도사 승려 5명이 표충사를 방문하여 조선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계획하였다. 표충사 승려들은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만드는 한편, 인근의 절, 단장면, 산내면, 산외면 주민들에게 시위 참여를 독려하였다. 4월 4일 12시 30분경, 단장면 태룡리 장날에 농민 복장의 승려 7~8명이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대나무 깃발을 시장 중앙에 세우고 구연운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군중들은 ‘독립만세’를 외치며 돌을 던졌다. 헌병주재소가 부서지고 일본인 헌병군조가 맞아 쓰러졌다. 헌병이 급파되고 경찰 순사가 긴급 출동하여 발포하자 오후 2시쯤 군중들이 해산하였다. 이날 시위운동으로 364명이 검거되고 71명이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 4월 6일 부북면 만세운동

 부북면 춘화리∙청운리∙덕곡리 주민들에 의해 일어난 만세운동이다. 평양에서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돌아온 사립 계성학교 교장 김래봉김성수∙김응삼∙김영환 등 문중사람들과 의논하여 4월 6일 오후 12시 춘화리에서 의거하기로 하였다. 4월 6일 오후 12시, 5~6백 명의 농민들이 모인 가운데 김성수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군중들과 독립만세를 외쳤다. 밀양헌병분견소 헌병들과 경찰들이 53명을 검거 했으나 농민들이라 전부 훈계 방면하였고, 김성수는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 4월 10일 청도면 인산리 만세운동

 4월 10일 오후 10시쯤 50여명이 인산리(仁山里) 전단(田端) 광장에 모여 나팔소리를 신호로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시위대는 광산업을 하면서 모여 사는 일본인촌으로 몰려가 “너희들은 물러가라”고 크게 외쳤다. 일본인들은 전전긍긍하여 문을 잠그고 죽은 듯이 숨어 있었다. 군중들은 일본인 집에 돌을 던지면서 마을 광장으로 다시 돌아가서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고 해산하였다. 이 때가 한 밤중이고 경찰서도 멀리 있어 그 날 밤에는 경찰의 출동이 없었다.

 

[ 밀양 3∙1만세운동의 의의와 특징 ]

(1) 국외에서 활동하고 있던 밀양인사들을 ‘의열단’이라는 단일조직으로 결집하였다. 황상규, 김원봉, 윤세주 등을 중심으로 결성한 의열단은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폭력적 파괴를 중심으로 의열투쟁을 해방 때까지 다양한 형태로 전개하여 민족해방운동에 큰 기여를 하였다.

(2) 국내 민족해방운동이 군민 대다수가 참여할 수 있는 방향에서, 즉 청년∙학생∙노동∙농민∙교육∙종교 등 부문별로 전개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하였다.


2. 부산의 독립만세운동

부산 만세운동 재현, 출처 : 연합뉴스 

[ 부산 만세운동의 전개 ]

∎ 3월 11일 부산진일신여학교 만세운동

 3·1 운동 발생 직후 서울의 학생 대표가 부산으로 내려와 서울의 상황을 알리고 독립 선언서를 전달하며 시위를 독려하였다. 이에 부산진일신여학교의 교사 주경애, 박시연의 지도 아래 고등과 학생 심순의, 김봉애, 김복선, 김반수 등은 태극기를 준비하고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3월 11일 21시, 이들은 준비한 태극기를 손에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기숙사를 뛰쳐나와 좌천동 거리를 누비며 만세 시위를 시작하였다. 이에 대중들이 호응하여 군중 수백 명이 힘찬 시위를 하였다. 시위 후 이들은 모두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복역하였다.

∎ 3월 13일 동래고등보통학교 만세운동

 당시 동래고등보통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김인호, 엄진영, 김귀룡 등이 만세 시위를 기획하였다. 3월 13일 동래 장터에서 ‘대한독립만세’ 등의 기치와 태극기를 휘날리며 ‘오왕독살(吾王毒殺)’이라고 쓴 수백 매의 전단지를 뿌리며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러나 곧 기마경찰과 군인 등이 현장으로 출동하여 시위를 진압하기 시작하였고 대다수의 학생들은 검거되었다.

∎ 3월 18일 범어사 만세운동

 1919년 2월 하순경 한용운이 범어사로 와 오성월, 이담해, 오이산에게 만세 시위를 독려하고 상경했다. 이에 범어사 주지는 김법린, 김영규, 차상명 등 승려와 명정학교 및 지방학림 학생 7명을 범어사 대표로 서울 3·1 운동에 참가하게 하였다. 이들은 3월 4일, 독립 선언서 등의 문건과 시위 경험을 가지고 돌아왔다. 부산에서도 3·1운동의 열기가 달아오르자, 범어사 관계자들이 3월 8일 동래 장날에 만세 시위를 시도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범어사의 승려와 학생들은 새로운 계획으로 동래 장날인 3월 18일을 거사일로 잡고 동래 장터 일대를 중심으로 만세 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 17일 범어사 명정학교와 지방학림의 졸업식 송별회 자리에서 학생들도 시위에 동참하기로 하였다. 시위 주동자들은 어둠을 틈타 두 편으로 나누어 18일 새벽, 동래 복천동 범어사 동래포교당으로 잠입하였으나 명정학교 학생 오계운이 거사를 누설한 후였고 출동한 일본 헌병과 경찰에 의해 김영규, 차상명 등은 연행되고 나머지는 강제 해산되었다. 검거를 피한 이근우, 김해관 등 40여 명은 동래읍성 서문 부근에서 남문까지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19일 오전, 허영호의 주도하에 한 번 더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고, 그 후 두 차례의 시위를 더 감행하였다. 시위 후 주동자 35명 대부분은 체포되어 복역하였고, 일제는 명정학교와 범어사 지방학림을 해체시켰다.

∎ 3월 29일 구포 장터 만세 운동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 양봉근이 서울에서 내려와 윤경, 유기호와 만나 거사를 당부하고 상경하였다. 임봉래, 유기호, 윤경 등은 3월 27·28일 박영초, 이수련 집에서 논의하여 3월 29일 구포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이들은 교대로 독립 선언서와 태극기를 만들고, 의거 전날 밤 큰 태극기 하나와 ‘대한 독립 만세’라고 크게 쓴 현수막도 만들었다. 3월 29일 정오 박덕홍, 손진태, 김장학 등과 비밀리에 독립 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누고 장꾼 1,000여 명과 시위에 들어갔다. 일부는 시위를 위하여 시장 철시를 호소하면서 장꾼을 지휘하였고, 김윤길 등은 구포면사무소로 가 면장에게 동참을 촉구하였다. 그 후 12명의 주도 인물이 구포주재소에 구금되자 임봉래, 윤정은 등은 1,2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석방을 요구하며 구포주재소로 돌진하였다. 일제 경찰들은 시위 군중들에게 무차별 발포를 하여 강제 해산시켰다.

∎ 4월 5일, 8일, 10일 기장면 만세 운동

 기장면 3·1 운동김수룡이 기장 지역 청년들 김도엽, 권철암, 구수암 등에게 독립 선언서를 전하면서 계획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4월 5일 기장 장날 오전 11시로 거사 일정을 정하고, 옛 기장 장관청 등에서 독립 선언서를 등사하였다. 4월 5일, 김도엽은 ‘양심발원(良心發源) 인도적 자유 민족’, ‘조선 독립 만세, 조선독립단’이라고 대서특필한 큰 기를 들고, 기장 시장에서 선언서를 반포하고 수백 명의 군중과 “조선 만세”를 외치며 만세 시위를 하였다. 일본 경찰은 공포를 쏘며 위협했으나 시위는 오후 5시까지 계속되었다. 결국 동래경찰서에 연락하여 일본 군대와 경찰 원조 부대의 지원으로 시위대를 진압하였다.

 하지만 4월 8일과 10일에 시위는 다시 발생하였다. 8일 오후 10시, 노동자와 부인들이 주도하 수백 명이 만세 시위를 전개했고, 10일 오전 9시에는 기장공립보통학교 교정에서 검거를 피한 주도자들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50여 명이 기장면을 누비며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점점 불어나 밤 9시 경에는 1,000명에 이르렀고, 시장으로 집결하여 다음날 새벽까지 만세를 외쳤다. 시위는 일본 군경의 무차별한 탄압과 발포로 무력 진압되었고 주도자들은 검거되어 투옥되었다.

∎ 4월 9일 좌천 장터 만세 운동

 정관면의 오해환이 기장면 김수룡으로부터 독립 선언서를 구해 와 오진환, 김종복에게 전하고 함께 동지를 규합하여 비밀리에 시위를 계획하였다. 4월 9일 이른 아침부터 많은 장꾼이 모였고, 신두성, 김윤희 등 5명이 장시 중앙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자 500~600명의 장꾼들도 일제히 호응하였다. 이들은 경찰의 제지를 물리치고 장시를 누비며 만세 시위를 하였다. 시위가 더욱 고조되고 시위 군중이 점점 늘어나자 일본 군경은 무력 탄압과 발포로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이로 인해 많은 군중이 다치고 체포되었다. 시위 군중들은 붙잡힌 주도자를 석방시키기 위해 좌천 주재소로 가서 일본 군경과 투석전을 벌여 체포된 주도 인물들을 석방시켰고 좌천에서 정관으로 돌아오면서까지 만세를 불렀다. 시위가 끝난 뒤 일본 군경에 의해 주도자들은 체포되었다.

∎ 4월 10일 철마면 만세운동

 기장면의 시위소식을 접하고 김수찬, 오덕근, 정인준, 김운일 등을 중심으로 철마면에서의 거사를 계획하였다. 거사일은 기장 장날 4월 10일로 하고 주민들과 와여리 중산에 모여 선언서 낭독 후 기장까지 만세 시위를 전개한다는 구체적 안까지 정하였다. 그리고 김운일, 정인영, 김재규 등은 4월 8일 기장면 시위에 참가하였는데 김운일이 일경에 체포되어 부산으로 압송되어 가던 중 대변리에서 탈출을 하여 다시 철마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런데 4월 10일의 거사가 이미 일본 경찰에게 알려져 진행이 힘들어졌다. 그럼에도 주도 인물들은 와여리 중산에 모여 예정대로 거사를 시작하였다. 이에 마을 청년 20여 명도 시위에 동참하였다. 시위가 진행되자 미리 숨어서 대기하고 있던 수십 명의 일경들이 시위 군중을 포위하고 주도 인물들을 체포하였다. 그러나 주도 인물들은 거유 오덕근의 노력으로 전원 석방되었다.

 

[ 부산 만세운동의 의의와 특징 ]

(1) 부산진일신여학교와 동래고등보통학교 만세운동은 이후 이어진 부산 지역의 만세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2) 구포 장터 만세 운동은 이전 시위가 학생 중심이었던 것과 달리 노동자, 농민, 상인이 중심이 되어 전개된 데 큰 특징이 있다.

(3) 기장면 만세 운동은 일본의 폭력적 탄압에도 3차례나 진행되었다.

(4) 철마면 만세 운동은 기장면 운동에 영향을 받아 진행되었고 기장면과 연계 하에 시위를 진행한 모습을 통해 다른 지역과의 연계를 통해 시위를 확장해 나가는 3·1 운동의 특징을 파악할 수 있다.

 => 부산 지역민의 저항 의식은 1920년대 부산 지역의 청년, 여성, 농민, 사회 운동 등 항일의지에 영향을 주었다.

 


[ 3·1 만세운동의 의의 ]

서울 동대문을 꽉 메운 시위군중, 출처 : 한국근현대사사전

1. 민족의식 고취

 3·1만세운동은 당시 신분, 지역, 남녀노소를 뛰어넘어 모든 사람들이 운동에 동참하였고, 그 과정에서 연대감, 동질성을 느끼게 되었다. 운동에 참여한 사람은 동질성을 확보할 수 있었고, 거족적 봉기를 통해 같은 민족이라는 의식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2. 신분의식 붕괴

 1920년대 양반들 머릿속에는 신분제가 남아있었지만 여론주도층과 언론에서는 그런 생각을 가지면 안 된다는 주장을 했고, 3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신분의식도 거의 무너져가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3·1만세운동은 근대민족형성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20세기 100년 역사를 볼 때 3·1운동만큼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전 민족이 동참한 사건은 찾아보기 어렵다.

3. 일제의 통치방식 변화

 3·1운동은 일제가 우리나라에 대한 지배 방식을 무력통치에서 문화통치로 바꾸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에 대항하는 민족 의식을 잠재우기 위한 방법이긴 했지만 우리 민족과 문화를 인정하는 방식이 등장한 것이다.

4.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의 원동력

 3·1운동을 통해 우리 민족 스스로의 의지와 힘독립을 향한 마음이 서로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독립운동의 주체가 지배자가 아닌 민중이란 자각을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각은 만주와 상하이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큰 원동력이 되었다.

5. 다른 나라에 미친 영향

 3·1 운동으로 우리 민족의 독립에 대한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린 것도 중요한 의미였다. 일본 덕에 조선이 살기 좋아졌고, 또 조선은 일본의 통치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던 세계 사람들은 조선이 독립하기를 염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게 되었다. 또한 3·1 운동은 중국의 5·4 운동, 인도의 비폭력 투쟁, 대만과 인도네시아의 독립운동 등 다른 나라의 독립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대한독립만세 "

이 함성과 정신을 영원히 잊지 않고 감사하며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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