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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하나

역사│항일에 앞장섰던 윤세주 열사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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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일에 앞장섰던 독립운동가, 석정(石正) 윤세주 열사 ]

출처 : 위키백과

  [ 석정(石正) 윤세주 ]

 - 출생 ~ 사망 : 1901. 6. 24 ~ 1942. 5. 29

 - 출생지 : 경남 밀양군 밀양읍 내이동

 - 가족 : 5남매(4남1녀)중 막내

 - 학력 : 신흥 무관 학교

 - 경력 : 조선의용대, 한국대일전선통일연맹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 조선의열단, 연무단

 - 수상 : 건국훈장 독립장

 

1. 윤세주의 유년시절

윤세주(尹世冑), 소룡(小龍)이라고도 한다. 윤세주선생은 1901년 6월 24일 경남 밀양군 밀양읍 내이동에서 부친 윤희규(尹熺奎)선생과 모친 김경이(金卿伊)여사 사이에서 5남매(4남1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겸손한 성격이었으나 일본 식민지 통치에 대해서는 온 생애를 통해 저주할 만큼 애국심이 깊었다. 경술국치 소식을 듣고 대성통곡을 하기도 하고 국민학교 재학 당시 일왕의 출생 기념일에 받은 일장기를 화장실에 버릴 만큼 일제에 대해 큰 적개심을 지니고 있었다.

 

2. 윤세주의 죽마고우, 약산 김원봉

출처 : EBSi

윤세주는 3살 위인 약산 김원봉과 같은 마을에서 이웃사촌관계로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냈다. 김원봉과 함께 학교에서 일장기를 버리는 등 항일 운동을 해왔고, 성인이 된 후에는 국경을 넘어 김원봉과 ‘의열단’의 일원으로 평생을 함께 독립 운동을 하는 동지가 되었다.

 

3. 동화중학교장에 감화되어 연무단 조직

윤세주는 밀양의 민족주의적 사립학교인 동화(同和)중학에 입학하면서 항일 인사였던 을강(乙江) 전홍표(全鴻杓)교장의 영향으로 항일정신을 키워갔다. 윤세주는 전홍표 교장의 애국사상에 감화되어 학교 내 비밀결사인 ‘연무단(練武團)’을 조직했다. ‘연무단’ 은 당시 금지되었던 개천절 기념행사를 갖고 시위를 벌였다. 이 사건으로 동화중학은 폐쇄되었으나 윤세주의 가슴에 반일, 배일사상은 영원히 남게 되었다. 또한 그는 항일운동을 포기하지 않고 1919년 경성에서 3·1 운동 시위에 참가한 뒤 고향에 내려와 밀양 지역 만세 운동을 조직했다.

 

4. 서울 3·1 만세운동 참가 후 만세운동 조직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한 윤세주는 만세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해 고향에 내려가 동지들을 규합했다. 13일 하오 1시쯤 수천 명이 모인 고향 장터에서 그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자 동지들은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쳤다. 일제는 그를 당장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일본 경찰의 수배를 피해 윤세주는 중국 동삼성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일본은 그 해 4월 14일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에서 궐석재판으로 윤세주에게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했다. 그는 만주로 망명하여 요녕성 유하현에 있는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갔다. 신흥무관학교는 당시 국내의 독립운동 비밀단체인 ‘신민회’의 결의에 따라 이회영(李會榮) 형제가 세운 독립군양성 무관학교로 윤세주는 이곳에서 정식으로 군사훈련을 받았다.

 

5. 중국 길림에서 김원봉 등과 ‘조선의열단(義烈團)’ 창립

출처 : https://blog.naver.com/silvyfox/222039603340

윤세주는 구체적인 항일방법을 모색하기 위해서 1919년 11월 9일, 죽마고우 김원봉 등 13명과 함께 ‘조선의열단’을 결성했다. 조선의열단에서는 이후 윤치형, 곽재기, 황상규, 이성우 등 수명과 결사대를 조직하여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경성일보사 등 일제의 식민 통치 기관 파괴와 원흉 처단을 결의하였다.

1920년 3월 중국인으로부터 폭탄을 구입한 뒤, 동지들과 폭탄과 무기의 국내 반입 및 군자금 모금, 폭파 공작 방법 등을 구체적으로 협의한 다음 각기 별도로 국내에 잠입하였다. 그러나 1920년 6월 즈음 거사를 위한 공작 도중 정보가 누설되어 윤세주와 그의 동료 50여명이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그는 5년 4개월의 감옥생활 후 1927년에 출옥하였다. 출옥 후 중외일보 기자, 경남 주식회사 사장으로 위장하여 독립 운동에 뜻이 없는 듯이 조용히 지내다 1932년 여름 경에 중국 난징으로 망명하였다. 독립운동에 대한 방법도 세련되어져 갔다. 윤세주는 과거에는 열정과 용기만을 갖고 싸웠으나 앞으로는 혁명적 인생관과 과학적 혁명 이론으로 재무장하여 정확한 혁명운동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6. 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 창설

조선의용대 기념사진, 출처 : 국가보훈처

 윤세주는 1932년 10월 20일 중국 군사위원회 간부 훈련단 제6대(약칭 조선민족혁명간부학교)에 입교, 1933년 4월 21일 제1기로 졸업했다. 이때는 독립운동 전선의 행동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은 때였다. 그래서 독립운동단체들은 연합준비위원회를 구성한 뒤 해외독립운동단체들을 참가시켜 그 해 11월 10일 ‘한국대일전선 통일연맹(韓國對日戰線 統一聯盟)’을 결성했다. 그리고 윤세주는 송병조, 김두봉, 김규식, 윤기섭 등과 함께 ‘한국대일전선 통일연맹’의 중앙집행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한국대일전선 통일연맹’은 1937년 독립운동가들이 소망하던 단일정당인 ‘민족혁명당’을 탄생시키는 모체가 됐으며, 1938년에는 중국군과 제휴하여 군사 조직인 ‘조선 의용대’를 창설하였다. 조선 의용대에서 손꼽히는 이론가였던 그는 민족 혁명당 편찬 위원회 주편으로서 선전공작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독립운동의 효과는 호전되지 않고 일군에 유리하게 전개되어 갔다. 독립운동을 적극 협력해 주던 중국 국민당 정부도 1938년 10월 25일 무한(武漢)이 일군에 함락되면서부터는 중공군과의 내전에만 심혈을 쏟았다. 

 

7. 윤세주, 끝까지 항일하다 장렬히 전사하다

 윤세주는 직접 조선의용대를 이끌고 중일전투에 참가했다. 1941년 4월에 그는 김원봉과 헤어져 박효삼과 함께 수많은 고난을 극복하고 황하를 건너 화북을 향해 북상해 갔다. 마침내 태행산 항일 근거지에 도착하였고 ‘조선의용대’를 ‘조선의용군’으로 개칭하고 중공 8로군과 함께 항일 무장활동에 열중했다. 윤세주는 모든 대원들로부터 가장 신뢰받는 지휘자로 존경을 받았다.

태행산의 윤세주 묘와 기념비,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1942년 2월 일본군은 4만 명의 군대를 동원해 태행산을 공격하기 시작하다가 5월에는 20개 사단 40만 명의 병력으로 대대적인 공격을 해왔다. 이때 조선의용군의 규모는 불과 3000~4000명 수준이었다. 일본군은 20개 사단 40만 명으로 태행산을 완전 포위한 후 전투기와 전차까지 동원, 본격적인 군사작전을 폈다. 맹공세를 퍼부어 5월 29일 항일 연합군사령부에서는 조선의용군에게 탈출로를 확보하여 전군이 탈출하도록 지원하라고 명령했다. 일군이 점령하고 있는 양쪽 산봉우리 사이의 탈출로를 확보하기 위해 두 산봉우리를 조선의용군이 공격, 전 부대원이 탈출할 때까지 사수하기로 했다. 작전개시 5시간 만에 탈출로를 확보하였으나, 윤세주는 이 전투에서 적탄을 맞고 쓰러졌다. 3일 뒤 동지들이 중상을 입고 쓰러져 있는 그를 발견했으나 이미 중태였다. 6월 3일, 그는 결국 석굴에서 숨을 거두었다.

 

“ 단결해서 적을 사살하기 바란다. ”

윤세주가 동지들에게 남긴 유언이었다. 그의 나이는 향년 41세였다.

윤세주가 전사한 뒤 1주년이 된 1943년 6월 중경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조선민족혁명당 조선의용군 등이 합동으로 선생의 추도회를 가졌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참고자료
∙ “윤세주 [尹世冑] - 태행산에서 지다(독립운동가, 이달의 독립운동가)”, 국가보훈처, 네이버 지식백과, 2011년7월18일 발행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572406&cid=59011&categoryId=59011
∙ “윤세주”, 나무위키, 2020년8월29일 수정 
https://namu.wiki/w/%EC%9C%A4%EC%84%B8%EC%A3%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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