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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하나

역사│6∙25전쟁과 피난수도 부산의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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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s://blog.naver.com/jssyh/221066834331

[ 6∙25전쟁의 발발과 임시수도 부산 ]

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북한군의 남침으로 개시되어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성립까지 만 3년 1개월 2일간 지속되었다. 6∙25전쟁은 ‘민족전쟁’이자 ‘이념전쟁’의 성격을 내포한 전쟁이었다. 또한 국제연합(UN)의 유엔안보리(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82, 83, 84호에 따라 유엔사령부가 설치되고 미군을 시작으로 유엔군이 참전하고, 1950년 11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제전’으로 확전된 전쟁이었다.

전쟁준비가 전혀 되지 않았던 대한민국은 전쟁 개시 며칠 만에 국토의 절반 이상을 내주고 남쪽으로 후퇴하였다. 이승만 정부는 6·25전쟁 발발 이틀 뒤에 대전(1950.6.27.~7.16.)과 대구(1950.7.16~8.17.)를 거쳐 긴급회의 후에 1950년 8월 18일 최종적으로 부산을 피란수도로 결정하였다.

정부는 1950년 8월18일부터 1953년 8월14일까지 1023일간 부산으로 정부 각 기관들을 옮겨 전시 비상 업무를 수행하였다. 당시 경남도청사를 중앙청으로 사용하고 부산시청사에는 사회부와 문교부가 자리하였다. 경남도지사 관사는 대통령 관저로, 부산극장은 국회로, 부산지방법원을 사법 기관으로, 부산지방검찰청은 검찰 기관으로 사용하였다. 이 때문에 부산은 정치인, 예술인, 기업인, 상공인 등으로 가득했다. 또한 전쟁을 피해 전국에서 수많은 피란민들이 철로와 해로로 대거 부산으로 유입되었으며, 많은 물자와 외국 군대도 부산항을 통해 부산으로 들어왔다. 이로 인해 당시 40여만명이었던 부산인구가 100만명을 넘어섰고 인구 급증, 군수물자 보급 등으로 부산에는 거대한 시장이 형성되었다.

6∙25전쟁 속에서 한국인들을 버텨내게 한 피란수도 부산과 함께 치열하게 살아내고자 노력했던 피난민들의 흔적을 부산의 유적지를 통해 살펴보자.

 

1. 임시중앙청(부산임시수도정부청사) (現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위치 : 부산광역시 서구 구덕로 225
  • 문화재 : 등록문화재 제41호 (2002.09.13.)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인 1925년 4월 ‘경상남도청사’로 건립되어 사용되다가 해방 이후 한국전쟁당시 부산이 임시수도가 되면서 임시수도정부청사로 사용되었다. 1950년 9월 28일~10월 27일, 1차 임시수도정부청사로, 1951년 1∙4 후퇴~1953년 8월 15일, 2차 임시수도정부청사로 사용되었다. 이후 다시 경남도청으로 사용되었으며 1983년 7월 경남도청이 창원으로 이전하였고, 1984년 11월부터 2001년 9월까지 부산지방검찰청 청사로 사용되다가, 2002년 동아대학교가 매입하여 건립 당시의 형태로 외관을 복원하였고 2009년부터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임시수도정부청사로 사용되던 당시, 모든 정부 소관부처의 업무를 조정 결정한 국정 최고 합의제 의결기관이었던 국무회의소와 국무총리실, 8개 정부 부처 등(총무처, 공보처, 법제처, 기획처, 내무부, 외무부, 국방부, 법무부, 대통령·부대통령·국무총리비서실)이 사용하는 정부종합청사로 당시에는 ‘임시중앙청’으로 불리었다.

이 곳에서 전쟁 상황의 대국민 홍보, 비상경비 예산 수립, 해외 원조 요청, 화폐 개혁 등의 일상적인 국가 업무가 이루어졌다. 특히, 1950년 8월 21일 정부 이전을 발표하였던 장소이자 한국에 군사병력, 기타 원조를 제공한다는 유엔안보리의 결의에 따라 1952년 5월 24일 체결한 한미경제조정협정(마이어 협정)의 현장이었다. 임시중앙청은 긴박했던 전시 상황 속에서 국정을 운영하기 위해 각종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였다. 이는 우리나라 근대사의 정치·사회적 변화를 간직한 역사적인 건물이자 대표적인 피란수도기의 정부관련 건축물이다.

 

2. 임시수도기념관 (대통령 관저)

출처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위치 : 부산광역시 서구 임시수도기념로 45 (부민동3가 22)
  •  문화재 : 사적 제 546호

1925년 진주에서 경상남도 도청이 부산 부민동으로 옮겨옴에 따라 1926년 8월에 목조 2층 기와집으로 지어져 경상남도 도지사 관사로 쓰이다가, 6·25전쟁당시(1950~1952) 부산이 임시수도가 되면서 이승만 대통령이 집무하는 관저로 사용되었다.

1983년 경상남도 도청이 창원시로 옮겨감에 따라 도지사 관사를 보수하여 임시수도기념관으로 활용하게 되었다. 1984년 6월 25일 개관하였으며, 임시수도 당시의 역사적 사실과 유물전시를 위해 기념관에는 임시수도 당시의 이승만 대통령의 유품을 비롯해 한국전쟁의 각종 자료와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 건물은 일본식과 서양식 건축양식이 절충된 목조건물로, 도지사가 대외적인 활동을 하는 대현관과 응접실 등은 서양식으로, 주거 공간은 일본의 전통적인 주거 양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념관 1층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부산도착, 인천상륙작전, 노천교실 수업 장면 등 당시 모습이 담긴 사진 120점이 전시되어 있다. 2층에는 당시 이승만대통령이 집무할 때 사용하였던 야전용 목침대, 책상, 의자 등이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이승만 대통령의 초상화, 환도를 그리워하며 직접 쓴 한문자작시 6폭 병풍등이 전시되어 있다.

6·25전쟁 당시 임시수도의 대통령관저로 사용되어 역사적으로 가치 있는 건물이며, 일제강점기의 건축 양식을 살필 수 있는 건축 사료이다. 2002년 5월 6일 부산광역시기념물 제53호로 지정되어 관리되다가 2018년 11원 6일 사적 제 546호로 승격되었다.

 

3. 부산근대역사관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위치 : 부산광역시 중구 대청로 104
  •  문화재 : 부산광역시 지정 기념물 제49호

부산 근대 역사관은 부산의 근현대 역사와 관련한 유물을 보관·전시·연구하고 있는 부산광역시립박물관 산하 박물관이다. 부산 지역에 현존하는 대표적인 일제 강점기 서양식 건물로 부산광역시 지정 기념물 제49호로 지정되었다. 특별전, 근현대 자료 발굴, 문화 체험 프로그램 운영 등을 통해 식민 통치와 미군정 등 외세로 점철된 근현대사에 대한 역사 교육 기관으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인 1929년 지어진 건물로서 최초에는 식민지 수탈기구인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으로 사용되었고, 해방 후인 1949년부터는 미국 해외공보처 부산문화원이 되었다. 이후 1999년 대한민국정부로 반환된 것을 그 해 6월 부산시가 인수하였다. 이 건물이 일제 식민 기구와 미군정 등 외세를 상징하는 건물의 역사성에 주목하여 교육의 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 부산근대역사관으로 조성하여2003년 7월 3일 개관하였다.

외세의 침략과 수탈로 점철된 부산의 근현대 역사를 ‘개항기 근대 부산’, ‘일제의 부산 수탈’, ‘근대 도시 부산’, ‘동양척식주식회사’, ‘근∙현대 한미 관계’ 등의 주제로 구성하여 전시하고 있다. 부산관련 근현대사 유물 200여점을 비롯하여 영상물, 모형물 등의 입체적인 전시물을 활용하여 부산의 근현대사를 한눈에 조명할 수 있도록 하였다.

 

4. 아미동 비석 마을

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위치 :  부산광역시 서구 아미동 산19번지

일제 강점기 때 부산에 살았던 일본인들의 공동묘지 터이며 해방 후 6·25전쟁을 거치는 가운데 피난민의 거주지 등으로 이용되면서 원래의 모습을 잃게 되었다광복당시 부산에 살고 있던 많은 일본인들이 갑작스런 일본의 패망으로 서둘러 귀국하면서 유족들이 묘지를 이장하지 못한 채 방치되었다그런데 6·25전쟁 때 전국에서 모여든 피난민들이 터전을 찾기 위해 이미 꽉 차 있던 중심 시가지를 벗어나 비어있던 묘지 땅에 터전을 마련하면서 비석마을이 생기게 되었다묘지든 비석이든 우선은 살아 내야 했던 피난민들은 묘지 위에다 천막을 치고 겨우 거처를 마련하였다그렇게 일제 강점기 죽음의 공간이었던 아미동 산19번지는 산 사람들의 터전이 되었다.

출처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일본인 공동묘지 「춘야가계대지묘」는 현재도 묘석들이 가옥 계단과 돌담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비석마을의 골목을 따라 거닐다 보면 공동묘지의 흔적들을 마주하게 된다. 각진 모양의 상석이나 비석들은 가파른 계단의 디딤돌로 쓰이거나 옹벽 또는 집의 주춧돌 등으로 활용되었다. 죽은 자의 무덤이 산 자의 삶을 받치고 있는 모양새다. 집과 골목 틈새마다 이러한 비석들을 볼 수 있다.

 

5. 국제시장

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위치 : 부산 중국 신창동 4가 일대

1945년 해방 후 본국으로 돌아가는 일본인들이 전시물자나 가재도구, 생활용품 등을 팔아 돈을 얻기 위해 장터를 형성한 곳이 도떼기시장이 되었다. '도떼기시장'이란 말은 당시 시장의 규모가 큰 것은 물론이고 없는 물건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있는 물건을 다 흥정하는 도거리 시장 혹은 도거리로 떼어 흥정한다는 뜻에서 그렇게 불렀다고 전해진다.

이 도떼기시장은 1948년, 판자 건물 12채를 지어 상인들이 입주하면서 자유시장으로 불렸다. 1950년 6·25전쟁 이후 피난민들이 모여 장사를 하면서 급성장하였는데 특히 미군의 군용 물자와 부산항으로 밀수된 온갖 상품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어 전국으로 공급되어 국제적인 상품이 거래된다고 하여 1950년 5월 국제시장으로 개칭되었다.

6·25전쟁 중에 부산으로 몰려든 피난민들로 성시를 이루면서 국제시장은 나름대로 특성을 지닌 채 인근 광복동, 남포동의 도심상가와 더불어 유통기능의 중추적 기능을 담당하였다. 귀환재일동포와 이북피난민들이 연고가 없는 부산에서 정착하는 과정에서 시장상인으로 등장하였고, 이들이 상권을 장악할 만큼 성장한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전쟁이라는 혼란 속에서도 국제시장은 활황을 누렸다. 미군의 원조물자, 구호품, 군용품이 민간소비용품과 함께 유통되었고 속칭 ‘양키시장’ 같은 곳에는 외제품이 넘쳐났다. 서울에서 피난살이로 부산에 내려간 문인, 식자들 중에서도 국제시장을 통해 먹고 살아갈 방편을 마련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따라서 당시 국제시장은 상거래장소를 넘어 사람들의 사회와 문화가 녹아든 공간이며 정보와 변화의 원천이었다고 할 수 있다.

 

6. 만남의 장소 -  40계단, 영도대교

( 1 )  40계단

출처 : 대한민국 구석구석

  •  위치 :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 1가 39-51

 1902년~1908년에 현재의 부산경남세관본부 부근의 북항이 매축되고, 1908년 중앙동에 부산역 광장인 새마당이 생긴 후 1909 ~1912년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무렵 해안가와 부산광역시 중구 동광동 5가로 통하는 언덕 윗길과 매립지를 잇기 위해 복병산 일부를 깎고 주택지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40계단은 계단 수가 40개여서 붙여진 이름이다. 6·25 전쟁 당시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피난민들은 부산항이 내려다보이는 영주동과 동광동 산비탈에 임시로 판자촌을 이루고 살았는데, 40계단은 이들 판자촌 주민들이 피난민들의 생계를 위한 구호물자를 내다 파는 장터이면서 부두노동자들이 일을 하러 오가던 곳이자 사람을 기다리고 만나기 위해 하루에도 수십 번씩 오가던 길목이었다. 즉 피난민의 슬픔과 외로움, 굶주림과 허기를 달래던 곳이자 약속과 만남의 장소였던 것이다.

( 2 ) 영도대교

출처 :  PNU로컬리티아카이브 - 「부산, 공간의 기억」

  •  위치 : 부산 영도구 대교동
  •  문화재 :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 56호

영도와 부산을 잇는 연육교인 영도대교는 1932년 3월에 착공하여 1934년 11월에 개통된 길이 214.7m, 폭 18.3m의 우리나라 최초의 연육교이자 우리나라에 잔존하는 유일한 단엽식 도개교(bascule bridge)로 희소가치가 매우 높은 교량이다. 하루 총 6회씩 도개하여 부산의 명물로 자리하였고 1966년 9월 증가하는 차량 통행으로 인하여 도개 기능이 멈추게 되었으나, 2013년 11월 27일에 기존 4차선을 6차선으로 복원, 개통하여 매일 오후 2시에 도개하고 있으며, 부산의 명소로 옛 명성을 다시 찾고 있다.

일제강점기부터 부산시민과 애환을 함께 해 온 영도대교는 8.15광복과 6.25전쟁 이후 생활고에 지친 피난민들이 애환과 망향의 슬픔을 달랬었던 장소였다. 전쟁 당시 영도대교에서 만남을 기약했던 사람들이 영도대교로 모여들었고 친인척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 영도대교 인근은 피난민으로 가득했고, 이들의 사연을 듣고 상담하는 점집들이 즐비했다. 또한 영도대교의 건설이 영도가 부산 도심과 육로로 연결되고 전차가 개통되는 등 도시로 성장할 수 있는 기폭제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영도대교는 근대 부산의 상징적인 의미이자 영도구의 도시 발달사를 증언하는 중요한 역사적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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